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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의 역사: 인류는 왜 ‘끝’을 상상하는가?

by yh222 2025. 5. 20.

인류가 왜 고대부터 종말을 상상해왔는지, 신화와 종교, 과학과 심리학으로 살펴보는 문화적·철학적 고찰.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은 단순히 ‘세상의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과 세계의 존재 이유를 되묻고, 마지막에 다다를 미래의 모습에 대해 상상하는 깊은 사유의 결과입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는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종말'을 말해 왔습니다. 신화, 종교, 과학, 철학, 그리고 예술 속에서도 종말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인간의 내면을 반영합니다.

이 글에서는 문화별 종말론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인간이 끝을 상상하는 이유를 철학적·심리적 관점에서 탐구해보려 합니다.

 

 

1. 고대 종말론: 신화로 말한 미래

노르드 신화의 ‘라그나로크’는 신들과 괴물들이 마지막 전투를 벌인 뒤, 세상이 물에 잠기고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절과 파멸이 아닌 순환과 재생을 담고 있습니다.

 

마야 문명은 ‘13번째 박툰’이 끝나는 시점(서기 2012년)에 세상의 한 주기가 끝난다고 보았고, 많은 이들이 이를 ‘세상의 끝’으로 오해했지만, 이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불교의 말법사상에서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점차 퇴색되어 결국 세상이 타락하고 새로운 부처(미륵불)가 출현한다는 순환적 종말관을 보여줍니다.

 

노르드 신화 라그나로크, 불교 말법, 요한계시록의 천사, 빅크런치 이론을 묘사한 4분할 종말론 일러스트
종말론

2. 성경과 이슬람의 종말관

기독교의 종말론은 요한계시록에서 명확히 나타납니다. 짐승의 표, 아마겟돈 전쟁, 심판의 날, 천국과 지옥.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선형적 흐름 위에 놓여 있습니다. 즉 시작-중간-종말로 이어지는 직선적 세계관입니다.

 

이슬람교 역시 유사한 구조를 갖습니다. ‘꾸르안’에서는 마지막 날(Yaum al-Qiyamah)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며, 각 인간은 심판을 받고 천국(Jannah) 혹은 지옥(Jahannam)으로 나아갑니다.

 

 

3. 과학이 말하는 종말

현대 과학도 종말을 다룹니다. 태양의 수명,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 빅크런치(Big Crunch), 빅립(Big Rip), 빅프리즈(Big Freeze) 같은 이론들은 우주의 끝이 어떻게 다가올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는 신화나 종교적 예언과 달리 수학적 모델과 관측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설명이지만, 결국 ‘끝’을 상상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인간적 욕망의 산물입니다.

4. 심리학이 보는 종말 상상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아는 동물은 인간뿐입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죽음’과 ‘세상의 죽음’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종말론은 곧 자아의 불안과 해소의 상징으로 작동합니다.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저서 『죽음의 부정』에서 인간의 문화와 종교가 결국 죽음을 부정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말했습니다. 종말론 역시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아닌, ‘죽은 이후에도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인가’를 묻는 철학적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5. 종말론은 미래를 결정짓는가?

흥미롭게도 종말론은 미래를 예측하기보다 현재를 통제하는 수단이 되곤 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종말 예언이 신앙심과 교회의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쓰였고, 현대 사회에서는 각종 음모론과 종말 유튜버들이 불안을 자극하며 상업적 이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종말론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도덕적 각성제 역할도 합니다. 핵무기 사용 이후 인류는 실제 종말을 현실화했으며, 기후 위기를 통한 생태적 경고는 우리가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 상상은 행동을 이끌기도 합니다.

6. 결론: 끝을 상상하는 자만이 새로운 시작을 그린다

종말론은 단순한 공포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이자 현재를 반성하는 사유의 시작점입니다. 고대 신화에서 현대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언제나 ‘끝’을 상상하며 ‘시작’을 만들어왔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종말에 대해 고민할 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재생, 파괴가 아니라 창조의 여정일 수 있습니다.